클로버밭
노르웨이의 숲 본문
조교수님 수업 때 이름을 알게된 소설. <노르웨이의 숲>으로 책을 냈으나 판매가 부진했고 제목을 <상실의 시대>라고 바꾸자 잘 팔렸다는 이야기였다. 독자가 끌리는 제목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고 한다. 당연히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위로의 문구가 제목인 책이 끌리는거겠지만 구체적인 사례여서 그런가? 엄청나게 읽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은 첫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인 <일인칭 단수>도 재미있게 읽었고 말이다. 작가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다른 사회,경제책에서 엄청나게 소설을 써낸다는 이야기. 라이프스타일에 대해서였다. 이 작가의 책이 더욱 궁금했다. 또한 노르웨이의 숲과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에서 연관성을 찾기 어려워 특히 이 책이 더 궁금했다. 교수님이 요즘은 다시 <노르웨이의 숲>이 잘 팔리는데 그 이유를 여쭤보셨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기를 끌고 그의 책을 다 읽거나 소장하려는 애독자들 덕분에 원작인 <노르웨이의 숲>의 가치가 올라간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으나 수업에서의 답은 힐링하고 싶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도드라지는 시대이기 떄문이었다는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비행기가 멈춰 서자 금연 사인이 꺼지고 천장 스피커에서 나지막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늘 그랬듯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고개를 들고 북해 상공을 덮은 검은 구름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어나 떠나간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
"언제까지나 기억할거야." 나는 말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니"
그런데도 기억은 어김없이 멀어져 가고, 벌써 나는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대체로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가볍다'라고 평했다. 평자들이 생각하는 좋은 문학 작품의 조건들 가운데 몇 가지가, 이를테면 사회 경제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 등이 그의 작품에서 읽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공동체,개인 또는 그 우주를 어떤 '눈'으로 끊임없이 관찰하는 치열한 의식이 내뱉은 직관의 언어
매력적인 인물이 한꺼번에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소설이었다. 현실에서 우리는 이런 인물을 거의 만나지 못한다.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만의 세계를 살아가기에 드러나지 않는다.
자연체. 이런말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어쩐지 자연 상태의 욕망이나 윤리에 익숙하다. 아마도 인간이 갖추고 태어나는 어떤 양질의 충동을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인격이라면 그들과 같은 모습을 띨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은 필연적으로 고뇌하고 고통받지 않을까. 그들은 일관되게 한 개체가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되는 관습이나 시스템을 대상화하는 힘을 선헌적으로 가졌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어떤 사회의 가치 체계, 미의식 같은 것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고 의식 속에 틀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어느시대 어느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닮게 된다. 괴테는 그런 것을 '자연적 태도'라고 했다. _ 번역가 양억관
